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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파주 역사여행: 감악산과 범륜사 – 조선의 불교와 유교가 만난 산

📑 목차

    파주의 서남쪽,
    임진강과 한탄강의 물길이 만나는 곳에
    푸른 능선 하나가 웅장하게 솟아 있다.
    그 산이 바로 감악산(紺岳山),
    예로부터 “서북의 명산”이라 불리며
    수많은 전설과 신앙, 철학이 깃든 산이다.
    조선시대 파주 역사여행: 감악산과 범륜사 – 조선의 불교와 유교가 만난 산

    감악산은 단순히 아름다운 산이 아니다.
    그곳은 조선의 유교가 번성하던 시대에도
    끊임없이 불교의 향기가 이어지던 곳이었다.
    율곡 이이가 마음을 닦으며 산책했던 산이자,
    선승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머물던 수행의 공간이었다.
    즉, 감악산은 조선에서 유교와 불교가 조화롭게 공존한 사상적 산이었다.

    조선시대 파주 역사여행: 감악산과 범륜사 – 조선의 불교와 유교가 만난 산

     

    감악산은 파주시 적성면과 양주시의 경계를 따라 솟은 해발 675m의 산이다.
    ‘감악(紺岳)’이라는 이름은
    푸른빛을 띠는 암석이 많아 마치 검푸른 산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이 산은 예로부터 조선의 명산으로 꼽혔다.
    풍수지리에서는 “한양의 북쪽을 지키는 산맥의 끝줄”로 여겨졌고,
    불교에서는 “용이 머문 산, 성현이 머문 자리”라 불렸다.

    그리고 그 산의 품 안에는
    조선의 불심이 깃든 오래된 절, 범륜사(梵輪寺)가 있다.

    감악산 – 파주의 지붕, 조선의 진산

    감악산은 파주의 진산(鎭山)으로 불린다.
    조선의 풍수학자들은
    “감악산이 안정되면 나라가 평안하고, 흔들리면 민심이 요동한다”고 했다.
    이 산은 한양과 개성 사이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조선의 수도 방어망의 일부이기도 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감악산은 파주의 서북쪽에 있으며, 산세가 웅장하고 바위가 험하다.
    임진강이 그 아래를 돌아 흐른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산은 조선 왕들이 북쪽 하늘의 기운을 안정시키기 위해
    기도를 올리던 신령스러운 산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조선 시대에는 산신제와 불공이 함께 열렸고,
    감악산 아래에는 절이 세워졌다.
    그 절이 바로 범륜사다.

     

    범륜사의 역사 – 조선 불교의 조용한 맥

    범륜사는 감악산 동쪽 기슭,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의 숲 속에 자리하고 있다.
    전해지는 설화에 따르면,
    고려 말 고승 나옹 혜근이 감악산을 수행처로 삼았고,
    그 제자 중 한 명이 이곳에 암자를 세운 것이 시초라 한다.

    조선 초기에 들어서면서 절은 범륜사(梵輪寺)로 불리게 되었고,
    ‘법의 바퀴가 굴러간다’는 뜻을 지녔다.
    이 이름에는
    불교의 진리가 세상 곳곳으로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임진왜란 때 절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조선 후기 승려들이 다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의 범륜사는 오래된 전각과 약수터, 작은 부도탑군이 남아 있으며,
    매년 봄·가을로 법회와 산사음악회가 열린다.

     

    감악산과 불교 – 자연 속의 사색

    감악산의 풍경은 그 자체가 하나의 불경(佛經)이다.
    바위마다 이름이 있고, 계곡마다 전설이 있다.
    그 중에서도 ‘운계폭포(雲溪瀑布)’는
    조선시대 문인들이 시를 읊던 장소로 유명하다.
    이 폭포는 범륜사로 올라가는 길목에 자리하며,
    물안개가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모습이 장관이다.

    조선의 학자들은
    감악산의 풍경을 유교적 수양의 공간으로 삼았고,
    승려들은 그 안에서 마음을 비우는 수행의 터전으로 삼았다.
    즉, 감악산은 조선의 두 사상, 유교와 불교가 공존한 산이었다.

    범륜사는 그러한 정신의 결절점이다.
    유교의 선비가 산을 오르면
    불교의 선승이 맞이하고,
    서로의 길을 이해하며 물러나는,
    그 조용한 공존의 자리가 바로 이곳이었다.

     

    범륜사의 문화재와 전각들

    범륜사는 비록 큰 절은 아니지만,
    그 안에는 조선 불교의 미학이 담긴 유산이 남아 있다.

    • 대웅전: 조선 후기 양식의 목조 건물로,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살, 지장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 삼층석탑: 절 입구 왼편에 세워져 있으며,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양식으로 추정된다.
      단아하고 균형 잡힌 비례가 특징이다.
    • 범종각: 지금의 것은 20세기 후반에 복원된 것이지만,
      조선 후기의 종 형태를 따랐다.
      종소리가 임진강까지 들린다고 전해진다.
    • 부도군: 과거 고승들의 사리를 봉안한 부도(浮屠)가 모여 있는 곳으로,
      이곳에서 감악산의 능선을 바라보면, 마치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하다.

    범륜사의 석탑과 부도는 현재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14호로 지정되어 있다.

     

    감악산의 설화 – 용과 중의 이야기

    감악산에는 다양한 전설이 전해진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용과 중의 설화다.

    옛날, 감악산의 계곡에는 용이 살았다고 한다.
    그 용은 하늘로 오르고 싶었지만,
    사람들의 욕심과 소음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어느 날, 한 스님이 범륜사에서 수행하다가
    용의 울음소리를 듣고 마음이 움직였다.
    스님은 사람들에게 “이 산은 신령하다. 함부로 해치지 말라.”며
    기도를 올렸다.

    며칠 뒤, 폭우가 쏟아지며 용이 하늘로 올랐고,
    그 자리에는 폭포가 생겼다고 한다.
    그 폭포가 바로 오늘의 운계폭포다.

    이 설화는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감악산이 가진 자연과 인간, 신성의 조화를 상징한다.

     

    감악산과 조선의 국토 방어

    감악산은 불교의 성지이기도 했지만,
    조선시대에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이곳에 진을 쳤고,
    조선 후기에는 감악산 봉수대가 설치되어
    적의 침입을 알리는 신호 역할을 했다.

    봉수대는 정상 부근에 있었으며,
    남쪽으로는 한양의 북한산 봉수와,
    북쪽으로는 개성의 봉수로 연결되었다.
    이 봉수 체계는 조선의 통신망이자,
    국가 안보의 최전선이었다.

    즉, 감악산은 조선의 신앙과 방어가 공존한 산이었다.

     

     오늘의 감악산 – 여행과 명상의 길

    현재 감악산은 경기도 5대 명산 중 하나로 지정되어 있다.
    정상까지 오르는 등산로는 여러 갈래가 있는데,
    가장 인기 있는 코스가 바로 범륜사 코스다.

    • 추천 코스
      범륜사 입구(적성면 설마리) → 운계폭포 → 감악산 정상 → 출렁다리 (왕복 약 7km / 소요 3시간)

    이 코스는 단순한 등산로가 아니라
    조선의 불교와 자연, 풍수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문화길이다.
    특히 가을이면 단풍이 범륜사 마당을 붉게 물들이며
    감악산의 암벽과 어우러진다.

    또한 ‘감악산 출렁다리’는
    파주의 관광 명소이자 평화누리길 제10코스의 일부로,
    감악산의 새로운 얼굴을 보여준다.

     

    감악산이 전하는 철학 – 머물되, 집착하지 말라

    감악산은 단단한 바위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부드러운 물줄기가 흐른다.
    그것은 마치 조선의 불교처럼,
    겉으로는 억눌렸으나 속으로는 흐르던 신앙의 모습이다.

    범륜사의 스님들은 말한다.

    “이 산은 조용하지만, 소리가 있다.
    그 소리는 마음의 소리다.”

    감악산은 우리에게 가르친다.
    세상 모든 것은 흘러가지만,
    그 흐름 속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이 수행이라는 것을.

     

    결론 – 산은 말을 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기억한다

    감악산은 파주의 뿌리이자,
    조선의 정신이 스며든 산이다.
    그 품 안의 범륜사는
    시대가 변해도 꺼지지 않은 불심의 등불이다.

    “산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산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감악산에 오르면,
    조선의 왕이 바라본 북쪽 하늘,
    선비가 읊은 시, 스님이 올린 염불,
    그리고 오늘의 여행자가 내쉬는 숨소리가 모두 하나로 겹친다.

    파주의 시간은 그렇게,
    산과 절 사이에서 조용히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