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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파주의 도심 속에도 조선의 흔적은 여전히 숨 쉬고 있다.
그중에서도 교하읍성(交河邑城) 은 조선이 외침과 혼란 속에서도 나라를 지키려 했던 의지의 성벽이다.
조선시대 파주 역사여행: 교하읍성 – 임진왜란의 상처가 남은 파주의 성곽,
오늘날 이곳은 일부 성벽만 남아 있지만, 돌마다 새겨진 역사의 숨결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교하읍성은 파주가 단순한 변방이 아니라, 조선의 북방 방어선이자 민생의 중심지였음을 증명한다.
한 걸음 한 걸음 돌담을 따라 걷다 보면, 400년 전 파주 사람들의 숨결과 임진왜란의 상처가 함께 느껴진다.

교하읍성의 역사적 배경
교하읍성은 조선 초 태종~세종 시대에 축조된 성으로 알려져 있다.
파주는 한양과 의주를 잇는 의주대로(義州大路) 의 핵심 거점이었고,
청나라·명나라 사신이 드나들던 관문 도시였다.
따라서 교하읍성은 단순한 방어시설이 아니라,
외교·행정·군사 기능이 복합된 북방 행정 중심지였다.
임진왜란(1592년)이 발발했을 때 이곳은 파주 지역 방어의 핵심 거점이었다.
성 내에는 군량미 저장고와 관청, 병영 시설이 있었으며,
주민들은 성벽을 따라 서쪽으로 피신하거나 남쪽으로 내려가 한양을 향해 도망쳤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교하읍성은 끝까지 방어선을 지켰고,
그 결과 일부 지역은 왜군의 진격을 막을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조선의 성곽, 단순한 돌담이 아니었다
교하읍성의 돌은 크고 둥글며, 각이 살아 있다.
이는 단순히 돌을 쌓은 것이 아니라 ‘하성(下城)’과 ‘상성(上城)’ 을 이중 구조로 설계한 방어 기술이다.
하성은 백성의 거주지와 관청이 있었고, 상성은 군사적 요새로 사용됐다.
조선의 성곽은 단순한 방어벽이 아니라, 도시의 질서와 신분의 구획을 상징했다.
성문은 남·북·동·서 4개가 있었으며, 남문이 주 출입문이었다.
남문은 화강암으로 정교하게 다듬어졌고, 성문 위에는 누각이 있었다.
지금은 남문 일부만 남았지만, 복원된 성벽과 안내문을 통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돌의 결이 일정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어 ‘사람의 손과 자연이 함께 만든 성곽’이라 불린다.
임진왜란의 상처, 그리고 파주의 기억
임진왜란 당시 파주는 가장 먼저 왜군의 진격로에 노출된 지역이었다.
교하읍성은 병력과 백성이 함께 싸운 몇 안 되는 읍성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교하 현감과 향리들이 백성을 이끌고 성문을 지키며 3일간 항전했다고 전해진다.
결국 성은 함락되었지만, 그들의 저항은 조선의 북방 방어망이 완전히 무너지는 것을 막았다.
그 후 인조 대에 이르러 교하읍성은 다시 정비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파주의 행정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지금도 교하읍성 일대에는 당시의 전쟁 유적과 옛 길이 남아 있다.
성벽 주변의 오래된 느티나무들은 파주 사람들에게 ‘전쟁의 증인’이라 불린다.
그 뿌리마다 당시 백성들의 고통과 희망이 함께 묻혀 있다.
교하읍성을 걷는 시간, 조선의 흔적을 따라
현재 교하읍성은 파주시 교하동 일대에 일부만 복원되어 있다.
그러나 남은 성벽과 유적지를 따라 걸으면,
조선의 도시 구조와 생활상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성 내부에는 관아터, 향교터, 그리고 옛 우물터가 남아 있다.
특히 파주향교는 교하읍성과 직선 거리 500m에 위치해,
학문과 행정이 한 공간에 공존했던 조선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봄이면 돌담길 사이로 들꽃이 피어나고, 여름에는 푸른 이끼가 성벽을 덮는다.
가을에는 노란 은행잎이 성곽 길을 따라 떨어져 마치 조선의 시간 위를 걷는 듯하다.
겨울의 고요한 성곽은 더욱 장엄해, 전쟁의 흔적과 평화의 대비를 느끼게 한다.
여행자를 위한 팁
- 위치: 경기도 파주시 교하동 250 일대
- 관람시간: 연중무휴 (자유 관람)
- 주차: 파주향교 공영주차장 이용 가능
- 주변 명소: 헤이리예술마을, 파주출판단지, 반구정 등과 함께 코스 구성 추천
결론
교하읍성은 지금은 잔잔한 돌담으로 남았지만, 그 안에는 조선을 지켜낸 백성들의 숨결과 희생의 이야기가 살아 있다.
왕이 머물던 궁궐, 학문이 피어난 서원, 철학이 깊어진 정자들이 조선의 정신이라면,
교하읍성은 그 정신을 현실로 지켜낸 민중의 성곽이었다.
조용히 성벽을 따라 걷다 보면, 지금의 평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땀과 눈물 위에 세워졌는지 깨닫게 된다.
파주의 돌담 아래 흐르는 시간은 여전히 우리에게 묻는다.
“나라를 지킨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 물음이 바로, 교하읍성이 오늘까지 존재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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