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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파주 역사여행: 파주향교 – 조선의 학교

📑 목차

     

    조선시대의 교육은 단순한 학문 습득이 아니라, 사람의 도리를 세우는 과정이었다.
    한양과 가까운 파주 교하 지역에도 그 정신을 고스란히 이어온 학문의 공간이 있었다.
    조선시대 파주 역사여행: 파주향교 – 조선의 학교, 바로 파주향교(坡州鄕校) 다.
    향교는 중앙의 성균관과 더불어 전국 각 고을마다 설치된 지방 교육기관으로,
    공자와 성현을 제향하고 선비를 가르치는 역할을 맡았다.
    파주향교는 한양 북쪽의 대표적인 향교로서,
    조선 전기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교육과 예(禮)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지금도 이곳에서는 조선의 선비정신과 배움의 의미가 조용히 숨 쉬고 있다.

    조선시대 파주 역사여행: 파주향교 – 조선의 학교

    조선의 교육 체계 속 파주향교의 위치

    조선은 국가가 직접 교육을 담당하던 나라였다.
    중앙에는 성균관이, 지방에는 각 도와 현마다 향교가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이미 15세기 초 교하현에 “향교가 있으며 교생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파주향교가 최소 세종대 이전부터 운영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13에는

    “교하향교는 현의 남쪽에 있으며, 교생 30명이 있다.”
    라고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다.
    즉, 교하(파주)는 조선 중기에도 정식 향교 체계를 갖춘 지역이었다.
    한양에서 불과 40km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중앙의 교육 정책이 가장 빠르게 전파되는 지방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파주향교는 조선시대 경기도 북부 지역 교육의 거점이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혼란기 이후에도 학문을 끊이지 않고 이어온 몇 안 되는 향교 중 하나다.

     

     파주향교의 건립과 중건

    파주향교의 설립 시기는 정확히 전하지 않지만, 조선 초기에 교하현이 설치되면서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1592) 때 건물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초 두 차례에 걸쳐 중건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의 상당수는 조선 후기 중건 당시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1976년 4월 9일, 문화재청은 파주향교를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했다.
    이후 파주시와 지역 유림의 협력으로 보수와 단청 복원 작업이 진행되어 현재의 단정한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
    향교는 지금도 춘추석전대제(春秋釋奠大祭)를 통해 공자와 성현들에게 제향을 올리는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향교의 구조와 건축 양식

    파주향교는 조선 향교의 전형적인 배치를 따르고 있다.
    건물은 남향이며, 앞쪽에는 학문을 배우는 공간인 명륜당(明倫堂),
    뒤쪽에는 제사를 지내는 대성전(大成殿)이 자리하는 전학 후 묘(前學後廟) 구조다.

    • 대성전(大成殿) : 공자(孔子)와 그의 제자 안자·증자·자사·맹자를 비롯해 송대의 주자 등 성현 10 철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매년 봄·가을에 석전대제(釋奠大祭)가 열려, 지금도 유림이 조선의 예법으로 제향을 올린다.
    • 명륜당(明倫堂) : 선비들이 모여 경서를 강론하고 토론하던 강당이다.
      이름 그대로 “인륜(人倫)의 밝음”을 뜻하며, 도덕적 인간이 되는 길을 배우던 곳이다.
    • 동재·서재 : 학생들의 숙소이자 자율 학습 공간. 오늘날로 치면 기숙사와 스터디룸의 역할을 겸했다.
    • 홍살문과 외삼문 : 성현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속세와 배움의 공간을 구분하는 상징적 경계였다.

    건물은 기와지붕과 붉은 단청이 조화를 이루며, 조선 후기 목조건축의 단아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기단부에는 돌을 반듯하게 다듬어 쌓았고, 지붕의 추녀는 길게 뻗어 절제된 선비정신을 상징한다.

     

    향교의 역할 – 교육과 제향의 중심

    조선시대 향교는 두 가지 기능을 맡았다.
    하나는 교육 기관, 다른 하나는 제향 기관이다.

    교육 기능에서는 지역 사족(士族)의 자제들이 모여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배우고 성리학의 기초를 닦았다.
    교생들은 매일 새벽 향을 피우고 경서를 암송하며 ‘지행합일(知行合一)’—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하나—의 가르침을 실천했다.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향교는 정신적 기반이자 도덕적 울타리였다.

    제향 기능으로는 매년 2회, 봄과 가을에 공자를 비롯한 성현의 위패에 제사를 지내는 석전대제가 있었다.
    파주향교의 석전대제는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의식은 조선시대 예법과 음악, 의복을 그대로 재현하여 전통 의례 문화의 소중한 가치를 보여준다.

     

     전란과 근대의 변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파주향교는 여러 차례 피해를 입었다.
    기록에 따르면 병자호란 당시 청군이 파주 일대를 점령했을 때 향교의 제기와 서적이 약탈되었다고 한다.
    이후 조선 후기 지역 유림들이 복원 운동을 일으켜 건물을 다시 세우고 교육을 재개했다.

    일제강점기에는 향교 교육 기능이 사실상 중단되었지만, 광복 이후 지역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향교보존회를 조직했고,
    1960~70년대에 이르러 다시 제향과 교육 활동이 부활했다.
    현재는 파주시청과 유림이 함께 운영하며, 전통 예절교육, 학생 인성교육, 성리학 강좌 등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의 파주향교

    파주향교는 단순히 과거의 유적이 아니다.
    지금도 살아 있는 전통 교육 공간이다.
    매년 3월과 9월 석전대제 때는
    파주 시민과 학생, 유림이 함께 참여해 조선의 예법을 직접 체험한다.
    또한 청소년 대상 전통예절·서예·경서강독 프로그램이 열리며,
    문화유산이 현대 교육으로 이어지는 선례를 보여준다.

    • 위치: 경기도 파주시 교하로 134번길 17 (교하동)
    • 관람시간: 09:00~18:00 (월요일 휴관)
    • 관람 팁: 향교 뒤편 돌계단에 오르면 조선시대 향교 전형 구조를 한눈에 볼 수 있다.
    • 주차: 교하향교 공영주차장 이용
    • 주변 명소: 교하읍성지, 반구정, 자운서원, 파주출판도시

     

    결론

    파주향교는 600년 세월 동안 조선의 도덕과 학문을 이어온 공간이다.
    그곳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던 조선의 교육 철학이 숨 쉬는 자리다.
    명륜당 앞마당에 서면, 과거 선비들이 책을 펼쳐 토론하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돌담과 홍살문은 세월의 풍파를 견디며 여전히 “배움의 길은 예(禮)에서 시작된다”는 진리를 전한다.

    오늘날 정보와 기술이 넘쳐나는 시대에도, 파주향교는 우리에게 조용히 가르친다.
    “지식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을 밝히는 일이다.”
    그 가르침이 파주의 역사 속에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